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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성공 스토리 ˝붕어빵 장사에서 수출기업인이 된 용궁식품 김태복 사장˝


CBN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7월 14일
↑↑ 용궁식품 김태복 사장
ⓒ CBN뉴스 - 경주
[이수진 기자]= 겨울철 동네 골목어귀에서 팔고 있는 붕어빵 한 두번 사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겨울철 영양 간식으로, 특히 서민들의 배를 채워 준 붕어빵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붕어빵이 최고조로 많이 팔린 시기가 한국전쟁 직후와 그 유명한 IMF 때라고 하니 붕어빵은 가히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1997년 IMF 이후 적잖은 사람들이 밥 대신 라면이나 붕어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많은 가장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천원에 다섯 개를 주던 붕어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집에 들어가서는 아내에게 밖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고 했다. 슬프고 아픈 추억이다.

붕어빵 장사 18년만에 이 붕어빵을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자랑스러운 기업인으로 성장한 김태복(71년생. 45세) 사장에게는 필시 남다른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인생사 불혹(40세)을 넘었으면 사연 없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마는 포장마차 붕어빵 장사에서 출발하여 수출기업인으로 당당하게 우뚝 선 김 사장의 인생역정이 궁금하다.

김 사장은 고령이 고향이지만 사업은 대구에서 처음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20대 중반의 나이에 대구백화점 앞에서 당시 유행했던 팬시점을 운영했다. 당시의 돈으로 월세 1천만원짜리 매장이었다고 하니 제법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경기도 좋아서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한다. 촛불은 꺼지기 직전에 가장 밝은 빛을 낸다고 했던가. 점점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은 김 사장은 더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팬시점을 그만두고 빚까지 얻어서 대구 성서공단 근처에 대형 해물식당을 개업했다.

그러나 장사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판단 착오를 한 것이다. 거기다가 친구 빚보증까지 해결해야 했다. 설상가상 결정적인 위기가 겹쳤다. 바로 IMF.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 때문에 손님이 떨어진 것은 둘째 문제, 엄청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그야말로 땡전 한푼 없이 망했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인생의 쓴 맛을 오롯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20대의 나이에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면서 적잖은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했건만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세상이 막막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4·50대의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0대 후반에 IMF 직격탄을 맞은 김 사장에게도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쓰러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고 청춘이었다.

한동안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던 김 사장이 제2의 인생을 개척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아직 젊은데 틀림없이 좋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아내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여 처가인 경주로 오게 된 것이다. 1년만 처가의 신세를 지기로 결심하고 경주 안강에 왔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보리쌀 서 말만 있으면 하지 않는다는 처가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안강에 터를 잡고 있던 장인(이동희. 현 68세)을 따라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장인은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경주를 거점으로 포항과 영천지역을 대상으로 붕어빵 기계를 대여하거나 판매하는 사업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 붕어빵이 IMF로 망한 김 사장에게 기회가 되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이런 것인가? IMF로 거리로 쏟아진 많은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붕어빵 장사를 하게 되면서 붕어빵 기계를 엄청 많이 팔았다고 한다. 인생 참 묘하게도 IMF로 망했다가 IMF 덕분에 또 어느 정도 사업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참으로 인생 앞날은 모를 일이다.

붕어빵과의 인연으로 제법 돈을 모으게 된 김 사장은 아예 식품회사를 차린다. 붕어빵 이름을 그대로 따서 ‘용궁식품’ 식자재 도매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또 날로 번창했다. 타고난 성실함에다 운도 어느 정도 따라 주었다. 내친 김에 도매업에 이어 빵 제조업을 시작했다.

제2의 인생을 만들어 준 붕어빵을 기본으로 하여 호떡과 만두, 당면 등 아예 본격적으로 식품제조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제품 이름을 ‘용의 궁’으로 바꾸었다. 빵 이외에도 다른 제품을 망라할 수 있으면서도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용’을 잊을 수 없어 ‘용의 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불국사 경주법주 공장 옆 7백평 대지에 공장과 창고도 지었다.

엄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전통 수제방식의 무방부제 영양간식으로 해바라기, 땅콩, 호박씨, 흑입자 등의 경과류를 넣은 ‘씨앗 호떡’과 ‘행복한 호떡’, ‘행복한 찐빵’ 등을 생산하여 유명 식품회사에 납품하는 것은 물론 캐나다와 카타르, 중국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

붕어빵 장사에서 이제 수출까지 하는 어엿한 수출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앞으로 수출국을 널려 갈 방침으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인근 지역 체인점에는 매일 새벽 신선한 반죽과 앙금을 공급하고 있다.

“수출제조업 분야로 정부 지원금을 신청했습니다. 공장이 증설되면 추가로 3-40명의 고용인원이 늘어날 겁니다. 직원들은 식구입니다. 끝까지 함께 갈 각오입니다.” 멀지 않아 지역 고용창출에도 한 몫을 하게 된다.

김 사장의 경영철학은 ‘패배의 두려움에 굴복하기보다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한 말이지만 김 사장의 살아 온 인생이 묻어있는 듯하다.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 꿉니다’라고 회사 홈페이지에 소개한 것처럼 김 사장은 ‘함께 끝까지 간다’는 각오로 직원들을 대한다. 같이 일하고 함께 나눈다는 생각이다. ‘성실하고 진실한가?’가 직원을 뽑는 기준이라고 한다. 인터넷에 ‘용의 궁’을 검색하면 잘 소개되어 있다. 경주시 구매1길 46. 전화번호는 054-775-6740

붕어빵은? 19세기 일본에서 처음 생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에서는 ‘타이야끼’라고 하는데 타이는 도미의 일본말. 도미구이라는 뜻이다. ‘칸베’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는데 현재도 3대째 손자가 가업을 잇고 있는데 73세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6.25 전쟁 직후 들어왔단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바삭바삭하면서도 말랑말랑한 특유의 맛이 꾸준한 인기의 비결. 경제가 어려우면 붕어빵 점포가 늘어난다고 한다. 핫팬츠 길이가 짧아지는 것처럼.
CBN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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