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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생 `백세인생` 윤여욱 옹의 삶˝

-사재 수십억 들여 학도병, 6.25 전사자 위령비 건립-
CBN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11일
↑↑ 윤여욱 옹
ⓒ CBN뉴스 - 경주
[김영길 기자]= 경주시내에서 오릉 쪽으로 가다가 남천교를 막 지나서 왼쪽 반월성으로 20m 정도만 가면 오른쪽에 「낙천원」이라고 쓰인 간판이 있는 마당 가운데에 황금색으로 치장한 거대한 불상과 위령비가 있다.

뒤에 있는 건물 안에 역시 와불과 약사여래불 등 크고 작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사찰인가 싶어 둘러보았지만 여느 사찰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불공을 드리러 찾아오는 신도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보통의 절은 아닌 것 같다. 얼핏 보아도 적잖은 비용이 투자되었을 법 한데 도대체 왜 이런 시설을 만들었을까 평소 궁금하던 차에 방문하여 이 낙천원을 조성한 주인공을 만났다.

낙천원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편안히 계시라는 뜻이다. 하늘이 천국이든 극락이든 상관 없다. 영령들이 즐거이 지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곳이다.

이 낙천원을 건립하고 관리하고 있는 분은 윤여욱(尹汝旭.100세) 씨다. 191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로 꼭 100세가 된다. 1919년 3.1운동 이태 전에 태어났다.

요즙 한창 유행하는 이애란의 노래 「백세인생」처럼 백세시대를 살고 있다. 청력이 좀 떨어져 보청기를 사용하지만 대화에는 큰 지장이 없다.

기억력도 비교적 또렷하다. 출타할 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정도로 몸도 건강한 편. 마른 체격이지만 부(富)티가 나는 모습이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두루마기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센스도 있다. 아마 윤 옹의 트레이드 마크가 두루마기인 듯하다.

윤 옹은 1970년대 당시 마용수 경주시장의 권유로 경주에 안착하게 됐단다. 당시 진딧물이 많은 한국의 무궁화 대신에 진딧물이 없는 일본산 무궁화 보급운동을 하다가 경주까지 오게 됐는데 마침 시장의 권유도 있고 하여 경주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 충남 공주 태생의 재일교포인 윤 옹이 경주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치고는 좀 설득력이 약하지만 일단 믿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윤 옹은 해방 전 일본에서 영화와 관련 직장과 사업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한때는 3년간 서울에서 한국의 뉴스를 일본에 전달하는 일도 했다고 한다.

아마 요즘 말하는 통신사나 특파원쯤 되는 것 같다. 올해 초 작고한 이철승 의원과는 젊은 시절 교분을 맺으면서 도움도 많이 주었고, 최근 국민의 당 윤여준 선대위원은 6촌 동생, 고려대학을 만든 김성수 씨와도 교분이 있어서 재단사무국에서 4년간 근무한 경력도 있다고 자신을 소개를 하는 것을 마루어 보면 20세기에는 일본과 한국을 무대로 나름대로 인생을 풍미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낙천원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우리나라는 한(恨)이 많은 민족입니다. 일제의 침탈과 6.25를 겪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추의 한을 품고 유명을 달리 했지요. 특히 6.25 때는 많은 학도병들과 전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조국을 지키려다 산화한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비록 저승에서나마 즐겁게 지내라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낙천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인생 만년에 수십억을 들여 이 낙천원을 만든 연유치고는 좀 의아스럽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상의 영혼을 달래어 저승에서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지요.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상의 영혼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부연 설명을 들어도 명확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국가나 자치단체에서도 현충원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호국영령들에 대한 예우를 하고 있는데 개인이 사비를 들여 영령들을 추모하고 있으니 왜 굳이 그렇게 해야 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나라 호국영령의 영혼을 위로한다니 시비 걸 일은 아니다.

윤 옹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해 놓고 있지만 그러나 불교신자가 아니다. 기독교인도 아니다. 불상을 보고 찾아 온 어느 스님에게 “극락에는 지금 겨울입니까? 여름입니까”라고 질문했더니 말이 막혀 그냥 가버리더라는 일화도 들려준다.

윤 옹의 생각은 스님이나 목사나 그저 한 인생을 살아가는 직업일 뿐 달리 특별히 여기지 않는다.

공자(孔子)는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논어 옹야 20)라 하여 귀신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멀리하라고 했다. 귀신에 끄달려 다니지 말고 인간의 개성과 주체성을 존중해야 된다고 강조한 말이다.

자 불어 괴력난신(子 不語 怪力亂神-논어 술어 20)이라 하여 공자는 괴상하거나 폭력적이거나 혼란스러운 것과 귀신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서에는 귀신 이야기가 여러 군데에 등장한다. 불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윤 옹은 그러나 귀신이든 영혼이든 종교와는 아무 관련을 짓지 않고 조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다.

윤 옹은 현실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남천내를 정비하여 충분히 관광자원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경주시가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충고를 빼놓지 않는다.

각종 공사를 하느라 수시로 도로를 파고 묻는 일은 일관성 없는 행정의 결과라며 일본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행정의 비효율성에도 질타를 마지 않는다.

한국에는 또 왜 그렇게 폐지 줍는 노인이 많으냐며 일본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예를 들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뭐하는지 모르겠단다. 경주에 관광협회가 있느냐고 기자에게 묻기에 있다고 대답하자 협회에 가입하여 관광과 관련 의견을 내야겠다고 한다. 아마 윤 옹이 관광협회에 가입하게 되면 아마 최고령 회원이 될 것이다.

“인생은 뭐 특별한 의미가 없어요. 그냥 살면 되지요.” 백세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성공한 온 윤 옹의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싱겁다. 하긴 현세의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우주는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듯이 인생은 목표도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달래준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나.

어떻게 한 세기를 사는 동안 건강과 부를 동시에 소유할 수 있었는지 질문하니 의외로 대답이 간단하다. “무리하지 않았어요.” 한창 나이에는 큰 규모의 회사를 경영할 기회도 몇번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싫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어서 하는 말 “인생에서 데미지를 입을 만한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결코 가벼이 넘길 말이 아니다. 자기 그릇을 스스로 알고 욕심을 내지 않고 신중하게 살아 왔다는 말이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공자의 말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생각나는 말이다.

윤 옹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대체로 당신은 복이 많았다고. 무궁화를 재배하려고 땅(현재의 문화중고 자리)을 사놓았는데 그 땅이 10년 뒤에 10배로 값이 올랐다거나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여 떼인 것으로 여기고 잊어버렸는데 나중에 몇 배로 갚아주더라는 것이다.

근래에는 꼭 필요한 땅이 있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평당 20만원짜리 땅을 40만원씩 주고 샀더니 돌아서니 평당 100만원 넘게 땅값이 뛰더라는 것. 혜안인지 복인지 알 수가 없다.

일본에는 본처가 아직 생존해 있고 한국의 부인은 몇해 전에 작고했단다. 큰 아들은 서울에서 식품관련 사업을 하는데 매달 3백만원씩 용돈을 보내오고 있고, 일본에 있는 작은 아들은 아파트 20채를 갖고 있단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책이 나오면 꼭 찾아오란다.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며 책을 한권 사주겠다고.
CBN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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