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창원별장 전삼달 장군에게 내린 광해군 어서 | ⓒ CBN뉴스 - 경주 | | [이재영 기자]= 영고정 전삼달 장군은 고려 충숙왕 원년 1315년 문과급제, 원나라에 파견 집현전 태학사, 병부상서를 지내면서 공민왕 1354년 까지 고려와 원나라를 넘나들며 조공삭감 외교를 38년간 펼쳐 나라를 소생시키고 피폐한 국민을 보호한 역사적 인물 竺山(龍宮 舊號)府院君 菊坡 全元發 선생의 9대손이다
| | | ↑↑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 장군에게 내린 인조대왕 어서 | ⓒ CBN뉴스 - 경주 | | 1570년 영천 호당리(이후 녹전동 이주)에서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인 가운데 먼저 떨쳐 일어나 오형제중 사형제(伯兄 全三樂 예조좌랑, 仲兄 全三益 봉화현감, 弟 西岡 全三省, 弟 訓練院 僉正 全三得)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산군 권응수 장군등과 1592년 6월 9일 문천 회맹(경주복성전투)동년 6월 30일 형산강전투, 동년 7월 25일 영천복성 전투, 동년 8월 22일 영천사천 전투, 1593년 10월 29일 구강동고록(울산 태화강· 대양 전투), 동년 11월 3일 안강전투, 1596년 3월 3일 팔공산회맹(팔공산 전투), 정유재란에 방어사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1597년 7월 7일 화왕산 회맹(창녕, 화왕산 전투)에 참가 하여 여러 고을 의사들과 수성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군이 형제들과 정규군이 아닌 ,의병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력 공로와 二子(둘째 아들) 諱 全乃性, 訓練院 主簿도 제2차 조 ․ 청 전쟁(병자호란, 1636년)삭녕(경기 연천)전투에서 戰死 하는 등 장군의 충효정신은 후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역사적 그늘에 가려져 있다 〔三子(셋째아들) 全安性, 어모장군 天城堡萬戶, 장군의 손자이자 全安性의 一子(첫째아들)全爾墩, 선략장군 安興堡萬戶 歷任)
| | |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전삼달 장군에게 내린 인조대왕 어서 | ⓒ CBN뉴스 - 경주 | | 정유재란을 합한 7년의 전쟁이 끝나고 차츰 정국이 안정되어가는 그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이듬해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 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제1차 조. 청 전쟁 (정묘호란,1627년)후 朝廷에서는 청의 위협이 걱정 되어 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있는 공을 黃海道兵馬節度使 兼 黃州牧使로 발탁 1628년 8월 16일 인조대왕이 친히 인견하여 황주가 안주다음 국가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강조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황해 병사로 재임시 나쁜일에 엄격하고 주변사람들을 편하게 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욕심이 없이 깨끗하였고 공적으로 누를 끼친 일이 없이 청백하고 근검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사졸들에게 미쳤으며 겹 비단 옷을 입지 않았고 창고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朝鮮王祖實錄, 墓地銘(이장당시 墓에서 발견된 誌石, 晋州牧使 鄭好仁謹誌) 參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