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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지역 호국의 인물! 독립운동가˝일천 정수기(鄭守基) 의사˝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입력 : 2016년 06월 03일
↑↑ 일천 정수기의사 기념비
ⓒ CBN뉴스 - 경주
[이재영 기자]=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경주지역의 유일한 독립운동가 일천 정수기(鄭守基) 의사를 제조명 해본다.

일천 정수기(鄭守基) 의사는 1896년 4월 24일 경주 월성에서 태어나서 1936년 1월 10일 생을 마감 하셨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儒林)의 원로인 김창숙과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8월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북경(北京)으로 의열단(義烈團) 고문인 김창숙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를 보았다.

즉 만몽(滿蒙)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1923년 2월 손후익과 함께 국내에 들어왔다.

그는 1923년 4월부터 경북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창숙에게 보내었다. 1925년 7월 비밀리에 서울에 온 김창숙을 다시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집계획을 지시받고 경북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8월(음) 대구에서 김화식에게 김창숙의 취지문을 제시하고 협력을 구하는 한편 서울 남산공원에서 손후익, 이재락, 이동흠, 김동진 등과 함께 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 회동하였다.

여기서 조속한 시일 내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고 자신은 안동, 영주, 봉화 지방을 맡고 활동하여, 김창숙은 모금된 군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1927년 6월 18일 심산(心山) 김창숙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며 그는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동년 8월에 입국하여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鄭守基)1년여의 긴 예심과 옥살이 끝에 그는 192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으로 인하여 불구의 몸으로 촐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위치도
ⓒ CBN뉴스 - 경주
한편 건립 후 40년 동안 관리자가 없어 노후되고 방치 되었던 것을 현충시설을 담당하는 지킴이의 각고의 노력으로 국고 950만원 지원받아 2009년 4월 10일~30일까지 개보수하여 현충시설물 안전관리 및 주변 환경을 개선하여 일반국민과 학생들의 호국 명소로 조성하였으며 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1968년 경주시 건천읍 송선1리에 기단높이 1.8m, 비높이 2m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경북남부보훈지청(지청정 박창표)과 건천읍 체육회에서는 매년 8월 15일 일천 정수기 의사의 공적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찾아 헌화 분양하고 그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대제전을 거행하고 있으며 추모사업 및 광복절 기념 읍민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입력 : 2016년 06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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