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향가`의 맥을 `정가`로 잇는다.
- 전 '경주휴게실' 허화열 사장, 경주시민께 받은 은혜 보답할 터 -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입력 : 2016년 04월 08일
| | | ↑↑ 허화열 사장 | ⓒ CBN뉴스 - 경주 | | [김영길 기자]= 오는 4월 13일 개봉될 영화 '해어화' 1943년 비운의 시대, 조선 최고의 가수를 꿈꿨던 기생의 뒷 얘기를 다룬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효주 양이 영화 속에서 부른 노래 ‘정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언론의 조명이 부각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이 ‘정가’가 어떤 노래인가에 호기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가(正歌)는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 중에서도 고전(古典)에 속하는 노래인데 민요나 판소리와는 달리 감정을 절제하고 감성을 순화시키는 교양형,선비형,풍류형의 음악으로 화평정대(和平正大)하고 유장아정(悠長雅正)한 기품과 여유를 담고 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화려하고 애절하고 질탕한 표현도 등장하지만 그러나 최대한 중용의 도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라고 (사)한국정가진흥회가 소개하고 있다.
이어 협회는‘정가’는 ‘아정(雅正)한 노래’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아정’의 사전적 의미는 (분위기나 음악이)‘아담하고 바르다’는 뜻이다. 협회의 설명에 따르면 단아한 자세와 기품, 그리고 절제의 미덕을 정수(精髓)로 표방하고 있는 우리 전통음악이라는 것이다.
경주에서 이‘정가’를 공부하고 보급하기 위해 설립된「영제(嶺制)시조연구소」를 방문한 첫 인상에서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역시 단아하고 격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잔잔하게 흐르지만 그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어서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옛 선비들이‘정가’를 즐겨 불렀구나 하는 느낌이 와 닿았다. 거기에는 낭랑한 음조가 배경음악과 어우러져 시·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평면의 아름다움이라는 차원을 넘어 공간의 아름다움이 연출되고 있었다. 선생과 제자 모두 선생님으로 서로 존칭하는 모습도 특이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과 가치가 실존하고 있고, 이 다양성에는 수많은 재야의 고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허화열(許和烈.64세) 선생은 “한국 음악과 문학의 근원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라 향가의 발상지가 바로 경주”인데“ 경주에서‘정가’를 공부하고 전파하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정가’의 공부와 보급이야말로 경주사람으로서 의미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2005년 임방울국악제와 다음 해 mbc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문 장원에 이어 같은 해 전국 시조가곡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는 허 선생은 그러나 어릴적부터 ‘정가’를 공부한 것은 아니다.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우연이 인연이 되어 박덕화 선생(경주 거주, 78세. 경북무형문화재 28호)을 만나 5년여간 사사를 받은 뒤부터로 이른 바 늦깍이로 데뷔한 셈이다. 만학도로서 동국대 한국음악과도 마쳤다.
허화열 선생의 이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허 선생은 1954년 전북 진안의 가난한 집안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약관 20세의 나이로 서울로 갔지만 경주에 직장이 있다는 둘째 형의 권유로 경주로 오게 된 것이 경주와의 첫 인연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아이스케끼를 만들었던 서울냉동이라는 회사에서 3년 동안 냉동기사로 일했다. 23살의 나이에 결혼한 허 선생은 그러나 직장생활로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내를 설득, 회사를 그만두고 당시 아카데미 극장 사거리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다행이 말 그대로 ‘호떡집에 불난듯이’팔리면서 적잖은 돈을 모았다고 한다. 당시 매월 50만원 가량을 벌었는데 경주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두 배 가 넘는 수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90년대 아카데미 극장 주변을 다녔던 경주사람들은 대게 허 선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허 선생의 운은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호떡장사 10년만에 번 돈으로 얼마간의 빚을 냈지만 경주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경주휴게실」건물을 인수하여 휴게음식점을 차린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박이었다. 호떡뿐 아니라 도너스와 오뎅, 김밥, 닭튀김 등 다양한 메뉴가 경주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히 돈도 벌게 되었다.
당시 10여명이 넘는 종업원들의 인건비 외에 자녀들의 등록금을 모두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주휴게실을 아는 이들은 지금도 아쉬워하며 밤 늦게까지 간식거리와 술안주를 살 수 있었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포장마차 호떡장사로 시작하여 휴게음식점을 하여 돈을 벌었다고 질투반 부러움반 말들을 하고 있지만 20년 세월 동안 바람막이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비바람을 안고 등지고 부부가, 그것도 밤늦게까지 일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감동하고 공감할 것이다.
풍찬노숙 하듯이 치열하게 살아 온 20년 세월이 아니던가. 그 동안 장남은 미국의 명문 코넬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여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와 셋째 역시 서울에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있어준 시간도 거의 없는 중에서도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란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긴 허 선생은 어느 날 문득 당신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영업장에서 20년 세월 동안 고생한 아내가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가. 언제까지나 마냥 돈을 따라다니다 보면 인생이 허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충분한데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속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살았으니 자신을 돌아보면서 남은 생을 보람있고 의미있는 일에 투자해 보자던 차에 박덕화 선생을 만나 ‘정가’를 사사받게 되었고, 이제는 당신이 배운 것을 또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허 선생의 삶의 궤적을 곰씹어 보자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 허 선생은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해준 경주시민들에게 작으나마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당신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무료로 강습을 하고 있다.‘정가’에 관심이 있는 분은 「영제(嶺制)시조연구소」에 문의하면 된다. |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 입력 : 2016년 04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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