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논에는 유난히 개구리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봄이 되면 아무리 어린애라도 올챙이 알을 건져내어 손바닥에 담아서 놀 수도 있을 만큼 많았고 또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자라게 되면 온 동네 길바닥은 개구리들의 놀이터가 될 정도로 온통 길에는 개구리들의 세상이 되곤 했다.
이맘때는 누가 짧은 시간에 큰개구리를 많이 잡는지 시합이 벌어지기도 해서 온 마을로 개구리 사냥을 하러 다니는데 필수품이 가늘고 가지가 많은 나뭇가지였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개구리를 후려치면 그 자리에서 쫙 뻗어버려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 이었다. 허리춤 에는 잡은 개구리를 보릿대에 굴비 엮듯이 엮어서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때론 두꺼비를 능가할 정도로 큰개구리를 잡을 때도 있었는데 직접 구워 먹기도 했다.가까운 집 아무데나 들어가도 어느 집이나 장독대엔 왕소금 단지가 있었으므로 “소금 쪼매만 가가니더~~~” 하고 소리치고 가져와 강으로 내려가 불을 피워 잘 구운 뒷다리를 왕소금에 찍어 먹으면 쫄깃하고 고소하고 정말 별미였다.
어른들은 몸보신으로 드시기도 하셨는데 농사일로 바쁘므로 일일이 개구리를 잡으러 다닐 수가 없어서 해질 녘 우리들이 강가에서 개구리를 먹고 있을 때면 막걸리를 받아 슬쩍 옆에 끼시다 우리를 슬슬 밀어 내고는 우리가 잡은 개구리와 불을 차지 하시곤 했다.
이웃 마을의 유달리 보양식을 즐기는 어떤 아저씨는 어두워 두꺼비를 개구리로 잘못 알고 구워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구리들한테 많이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당시는 워낙 고기가 귀했을 때라 오로지 개구리 먹을 생각으로 봄이 오길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한창 자랄 때 단백질 보충으로 참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
또한 여름 방학이 되면 제출 과제물로 1인당 개구리 20마리 이상씩 잡아 말려서 학교에 내야하는 지금 돌아보면, 이상한 숙제도 있었다 . 어떻게 사용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학교의 축구부 선수들의 보양식으로 개구리를 갈아서 먹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 .....
가을걷이가 끝난 논은 마치 공설 운동장처럼 넓은 광장으로 축구장과 야구장이 되기도 했다. 그때는 축구공이 귀할 때라 지푸라기를 둥글게 압축해 말아서 축구경기를 하기도 하고 그것도 없을 때는 무엇이든지 굴러가는 물건이 생기면 자연스레 축구로 이어졌다. 그런데 운동화는 어려운 형편에 상상도 못하고 대부분이 고무신을 신고 있을때라 뛰면 신발이 공중으로 벗겨져 공보다 더 멀리 날아가기도 하기에 얇게 말은 새끼줄로 발등을 꽁꽁 동여매고 뛰었다.
논바닥이 울퉁불퉁 하고 벼 밑둥까지 남아 있을때는 넘어지면 온몸이 긁혀 상처 투성이가 되지만 오로지 이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골인이 된 상황에 짚 묶음인 축구공이 풀려서 무효처리가 되면 “골인이다” “무효다”라는 걸로 실갱이를 벌인다. 그러면 유달리 잘 뛰던 애들은 승부 근성도 남달라 화가 나서 집으로 가버린다. 그러면 나머지 애들은 흥미가 떨어져서 하나둘씩 흩어져 버리거나 야구가 한창인 다른 논 무리들에게로 옮겨 금방 다시 깔깔대며 놀기도 했다.
추운 겨울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 오면 우리들은 미리 “야!.. 보름날 달 보러 갈래?...”하고 약속을 잡는다.
보름날 저녁이 되면 윗마을부터 아랫마을 까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삼삼오오 한손에 빈 깡통을 들고 들판에 모여든다. 들판에선 빈 깡통에 구멍을 뚫고 단단한 줄로 손잡이를 만들어 불놀이할 준비를 단단히 한다. 일찍 온 아이가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아이들은 차례대로 불씨를 빈 깡통에 담고 그 위에 마른 나무를 조금 얹고 팔이 늘어질 정도로 깡통을 돌리면 연기와 함께 밑불이 살아 난다.
연기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불씨를 키우려고 이 논 저 논을 팔을 돌리며 막 뛰어 다닌다. 하나둘씩 돌려대는 깡통의 불빛은 전기가 없는 깜깜한 시골마을을 환히 밝혀준다. 붉은 불덩어리가 춤을 추는 밤은 들뜨고 즐겁게 깊어만 갔다 .
밤늦게 까지 우리들은 “ 달 봐라....!!” 하고 외치면서 추운 겨울밤에 지칠 줄 모르고 뛰어 다니다 불씨가 다 꺼져 갈 때쯤엔 깡통을 공중으로 “휙..”던져 올리면 불씨가 쏟아지면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된다. 모두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고 환호를 하지만 깡통을 잘못 던지면 바닥으로 내려 꽂히기도 하고 자기 머리위로 바로 던져 올려 불씨를 옴팡 뒤집어 쓴 뒤 데어서 동네가 떠나갈듯이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겨울방학 할 때쯤이면 동네 가까운 논 주인이 일부러 빈 논에 물을 가두어서 얼음지치기를 하도록 배려 해주었다. 그때는 남쪽지방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리도 춥고 눈도 많이 왔었는지.
한겨울 내내 얼음이 얼어 있어서 동네 모든 사람들은 얼음판으로 모여들어 그곳이 마을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스케이트는 구경 할 수도 없었고 일인용 썰매를 만들어 탔다. 송곳은 양손으로 잡고 균형과 가속을 내기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썰매 밑에는 대부분 굵은 철사로 해서 얼음과 마찰을 해서 스피드를 낸다. 간혹 최고의 부러움 대상이 되곤 하는 썰매는 밑에 낡은 식칼을 양쪽에 뒤집어 박으면 최고의 스케이트 썰매가 된다. 바닥에 칼날이 매끄럽고 속도도 엄청 빨라 마치 우리 눈에는 고급 스포츠카 로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종일 타다보면 얼음판에 수도 없이 넘어지기 마련이다. 경주시합을 할때면 회전 부분에서 거의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지는 게 일쑤였는데 지금처럼 방수가 되는 스키바지는 꿈도 못 꿀 때라 해가 지고 집에 갈 때면 엉덩이가 엄청 젖어 엄마한테 혼날것이 무서워 모닥불에 젖은 옷을 빨리 말리려고 불 가까이에 엉덩이를 들이 대다가 불꽃이 바지를 태워 옷에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집 앞 대문에서 겁이 나서 못 들어가고 서성이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오시면서 “ 우리 희야 와 안 들어가고 거기 서 있노?~..” 하면 나는 “아부지~~.. 바지가 젖어서...” 하고 울먹이면 아버지께서는 “ 괜찮다 들어가자 ”하시면서 앞장서신다. 아버지의 지게 뒤를 졸졸 따라 마당으로 들어가면 엄마께서는 나를 보지 못하시고 “희야는 와 아직 안오까요?~~배가 마이 고플 낀데~...” 하신다. 난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어서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 !!~~” 하고 친한 척 부르면 엄마는 내 꼴을 보고는 “ 이노무 짜슥!!!!!!~~~~ 아침에 옷 새로 입혀 놨는데에~~~.. ”“또 옷 젖어서 오네!!!!...”하고 빗자루로 내 엉덩이를 불이 나게 때렸다. 난 맞다가 얼른 엄마를 뿌리 치고 대문 밖으로 도망 나가 버렸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맨 뒷집 이었고 날이 어둑어둑 해지면 옛날부터 호랑이와 늑대들이 자주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무서워서 산 쪽으로는 도망가지 못했다. 젖은 바지에 체온은 자꾸 떨어지고 오들오들 떨면서 멀리도 못가고 대문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혹시 엄마가 날 데리러 나올까봐 집안을 기웃 기웃 거렸다. 종일 썰매 타면서 힘을 다 소진 되었고 배는 고파오는데 엄마가 날 데리러 빨리 안나오면 오히려 내가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엄마는 밥상을 다 차려서 방에 들여 놓으시고 고무신 한 짝을 벗은 채 도망나간 막내아들을 찾으러 한손엔 고무신 한 짝을 들고서 찾으러 나오시면 그 기척을 듣고 난 마치 대문 앞에는 안 왔던 척 얼른 뒷산으로 허겁지급 도망을 가서 숨어 있었다. 엄마는 늘 내가 잘 숨는 골짜기 계곡 안을 들여 다 보시며 “우리 희야 어디 있노..?”하면서 이쪽저쪽 찾으시는 시늉을 하신다. 밥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일찍 나타나기엔 자존심이 허락이 안되어 엄마를 한참 숨죽여 지켜보다가 결국 엄마는 내가 숨어 있는 줄 알고도 “우리 희야가 여기에는 없구나..”하고 내려 가시는 척을 하면.. 그제서야 난 얼른 “나.. 여기 있다 아이가!!!!~~..”하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나타나면 엄마는 “우리 희야 여기있었네..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노?~ ”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배 많이 고프제~ 담부턴 옷 버리면 안된데이~~~..” 하면서 나를 따뜻하게 데려가 주신다. 엄마와 손잡고 집으로 들어서면 아버지께서 ” 희야 어디 갔더노?.. 얼른 밥묵어라..“ 하며 나를 반겨주셨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고 수도시설도 없었기에 한겨울에도 흐르는 시냇물에 맨손으로 그 많은 식구들의 옷을 일일이 손빨래로 하셨고 또한 옷이 많지 않은 관계로 한번 입으면 적어도 2주정도 입어야 되는 시기였기에 하루 이틀 만에 빨래꺼리를 만들어 낸다는 건 엄마한텐 큰 숙제였습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우리엄마는 평생 화장품을 발라 보지도 못하시고 어려운 시대에 자식들을 위해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다. 갈라진 손마디를 보면 가슴이 짠해 집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